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2>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영화 <팬텀 스레드>는 관객의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수작입니다. ‘사랑을 지탱하는 가학(Sadism)과 피학(Masochism)의 ‘밀당’스토리’라고 분석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필자는 한 여자를 장악한 것 같지만 결국 그 여자에게 장악당하는 남자이야기로 봅니다.

<팬텀 스레드>는 역시 영화란 오롯이 감독이 경작하듯 파종하고 수확하는 홈그라운드이며 그만의 스타일을 밀고나가는 미장센의 대향연임을 증명해보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등을 통해 늘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작가주의적 묵직한 시선으로 고정 팬들을 몰고 다닙니다. 앤더슨 감독의 메시지를 누구보다 잘 소화해내는 주연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미 연기의 한 지평을 열어 제친 달인입니다. 강렬한 메소드 연기(실제 배역에 완전 몰입돼 배우와 캐릭터가 하나되는 연기력)로 관객의 시선을 강탈합니다.

1950년대 런던.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영국 왕실과 사교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고급맞춤복) 디자이너입니다. 그가 드레스를 짓는 과정은 유일무이의 예술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주의의 열정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의뢰인의 주문 스타일을 디자인하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나가는 숨 막히는 우아함이 객석 사이로 스멀스멀 체감됩니다.

중후한 영국 신사로서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하게 들이대는 이성. 레이놀즈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직 드레스만을 위해 사는 남자입니다. 유일한 혈육 '늙은 누나' 시릴과 더불어 작업실에서 자나 깨나 일에 몰두합니다. 의상실 여직원들 또한 침묵과 매뉴얼에 중독된 듯 유니폼을 입고 정제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시골 저택으로 내려가는 길.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는 젊은 웨이트리스 알마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알마 또한 자신의 운명에 덜커덩 소리를 내며 뛰어든 남자에게 어쩔 줄 모르며 화답합니다. 시골 저택에 함께 동행한 연인들. 레이놀즈는 알마의 몸 치수를 재고 시침질하고 마름질하면서 자신의 꿈에 꼭 맞는 뮤즈를 발견한 기쁨에 소스라칩니다. 숨겨져 있던 알마의 젊음은 레이놀즈의 디자인으로 더욱 뜨거워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레이놀즈의 드레스 모델로서 알마는 런던 의상계의 뮤즈로 만발하게 됩니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레이놀즈의 감성은 신경질적이며 날카롭습니다. 늘 먹던 것만 먹고 다니던 곳만 다니며, 오직 의상 작업에만 몰두하는 이 자폐성 천재는 주위 사람을 숨 막히게 합니다. 레이놀즈의 의상 스튜디오는 ‘런던 최고’라는 자부심도 가득하지만 박제화된 강박과 억압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공간에 레이놀즈의 유약함과 상처받기 쉬운 예민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별 볼 일 없었던 레스토랑 직원 알마의 삶은 레이놀즈를 만나고 나서부터 다시 태어납니다. 장인의 솜씨로 지어진 드레스를 입는 순간, 알마는 레이놀즈의 수많은 뮤즈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특별한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레이놀즈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난 그가 열망하는(desire) 것을 줬죠." 알마의 독백이 스크린에 흐릅니다.

알마의 캐릭터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욕망을 투사하는 여성입니다. 여느 뮤즈처럼 맞춰진 옷에 몸을 구겨넣는 모델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자마자 한 몸체가 되는 꿈틀거림이 있습니다. 알마 역을 맡은 룩셈부르크 출신 배우 비키 크리엡스는 <팬텀 스레드>로 할리우드 데뷔를 멋지게 완성시킵니다.

사랑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세계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합니다. 까칠하고 권위적인 레이놀즈의 아성은 같은 눈높이를 원하는 알마를 밀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룰 속에서 드레스만을 생각하며 사는 레이놀즈에게 온전한 사랑을 느끼고 싶은 알마는 드디어 위험천만한 선택으로 맞서고 맙니다. "내 사랑이 널 완성할 거야"라는 영화 포스터의 메인 카피는 알마가 느끼는 광기와 그 광기가 낳은 공포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레이놀즈는 몇 년 전 돌아가신 홀어머니의 모성에 아직 갇혀 있고 알마는 자신의 삶을 바꿔놓은 남자를 온전히 갖길 원합니다. 둘의 권력관계는 재력을 갖춘 남자에게 결국 순종하고 마는 여자의 궤도에서 벗어납니다.

레이놀즈가 판에 박힌 갑을관계를 강요하면 알마는 그의 강한 척함–속내는 참으로 취약한-을 꿰뚫어 보고 심약한 심리를 역으로 파고듭니다. 레이놀즈를 묶어두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는 알마는 대놓고 “난 당신이 무너지길 바라. 한없이 나약하고 연약해졌으면 좋겠어”라고 속삭입니다.

타이틀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는 은유적이고 중의적인 제목입니다. 보이지 않는 실, 천의무봉의 귀신같은 바느질 솜씨, 욕망의 실로 얽혀있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레이놀즈와 알마, 두 사람의 팽팽한 감정선을 조율해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꼼꼼한 바느질은 탁월합니다. 감독 제작 각본 촬영 몫을 혼자서 해냅니다.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 브람스의 ‘16개의 왈츠’ 등이 밀물과 썰물로 오고가는 배경 음악은 장편 심리소설 한 권을 독파한 기분을 선물합니다. 한 여인을 그러쥐려다 결국 그 여자에게 사랑의 포로로 안착하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물결칩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예고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선언은 진심일까요.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