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회원사 언택트 르포


올초 1월 20일에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벌써 다섯 달이 훌쩍 넘었다. K방역의 힘으로 잠잠해지나 기대했지만, 수도권 대전 등 산발감염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언제 마스크를 훌훌 털어 버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편집기자 운동회, 데스크 세미나 등 협회 주요 행사들이 미뤄지며 회원 간 교류가 단절됐다. 각 회원사에선 설마 했던 재택근무를 실험해 보고 부서원 간 업무공간 분리를 통해 비대면을 권고한다. 예년 같았으면 한 번쯤 다녀왔을 해외여행의 소확행도 못 누리고, 퇴근 후 맥주 번개의 꿀맛도 조심스러워진다. 코로나가 부른 뉴노멀, 회원 여러분은 안녕하신지. 지면을 빌려 전국 각지 회원사의 근황을 들어봤다.



경인일보 박준영(오른쪽) 차장과 장주석 기자가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 기획기사 편집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코로나 숫자에 지쳐가던 순간, 가슴을 울린 NYT 1면

강원일보 전윤희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지난달 내 마음을 묵직하게 울린 한 기사를 접하게 됐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5월 24일 일요일판 1면을 코로나19 사망자 1,000명의 이름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지면 신문이 배달되기도 전 SNS로 공개된 1면에는 그래픽이나 사진 하나없이 촘촘히 부고로만 채워졌다. 편집기자로서 1면이 주는 무게감을 알고 있던터라 1면 전체에 할애된 부고기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면 구성을 위해 미 전역 여러 매체의 사망자 보도를 일일이 찾아내고 1,000명을 선정하기 위해 이들의 삶을 종합해 추려냈다는 것이다. 지면에 적힌 “이들은 우리였다(They were us)”라는 문구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기획을 주도한 사이먼 랜던 그래픽에디터는 “우리도 대중도 코로나19의 데이터를 보는 데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NYT 내부에서도 신문을 만들면서 편집국과 독자로부터 ‘코로나19 장기화로 숫자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던 것이 1면 편집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문득 떠오른 일련의 일에 한없는 자책을 느꼈다. 야간당직 근무가 끝나기 직전인 늦은 시간에 지역내에서 확진자가 발생해 부리나케 판갈이하던 순간이었다. 언제부턴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상업광고인양 1면 한자리를 꿰찬 확진자 현황표에서 고작 숫자 몇 개 바꾸면서 귀찮음을 느낀 것이다. 뉴욕타임스 1면 부고기사에서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던 그날의 나.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수개월, 미지의 바이러스는 그렇게 성가신 일정도로 치부되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경했던 생활방식들도 익숙해졌다. 회사 출입하기 전 손소독제로 소독하고, 사무실 안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며, 수시로 체온을 체크하고, 구내식당에서는 따로 앉아 거리두기를 한다. 안 그래도 조용한 편집국이 더더욱 ‘음소거 모드’에 돌입했다. 자녀가 있는 선배들은 아이들 개학 연기가 한창이던 때 평일 연차를 사용하는 일이 늘었다. 회사 다니는 낙이 돼주던 ‘맥주 번개’가 사라지고 커피를 배달시켜 함께 소소한 회포를 푸는 일이 잦아졌다.  사람들에 치이며 소통하며 바쁘게 뛰던 일상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어느새 느리게 걷기로 바뀐 듯하다. 소통의 기회는 줄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있다. ‘빨리빨리’에 급급해 몰랐던 것들이 이제 비로소 보이게 됐다. 점심식사 후 회사 근처를 산책하고 선배 동기 후배들과 함께 모여 밥 한끼 차 한잔하는 일상이 소소한 행복이었음을, 이렇게 돼서야 알게 됐다.
멈추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겼다. 늘어나는 확진자 수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 속엔 각자의 자리를 지키려는 안간힘과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그리움, 타인에 대한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코로나 시대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매일매일. 편집기자로서, 회사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잠시나마 숨고르기를 하면서 알게 되는 요즘이다.


함께 하는 맥주 한 잔, 커피 한 잔이 그립다

경상일보 서정혜 기자

코로나19 국내 첫 환자 발생 이후 다섯 달. 감염병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스크 착용은 필수, 출근 후 소독제로 책상과 키보드를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업무차 데스크나 타 부서와 대화가 필요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고쳐 쓰고, 갑작스레 나오는 재채기나 잔기침에도 주변 동료들을 의식하기 일쑤다.
신문사는 각기 다른 출입처를 맡은 취재기자들이 있는 데다 여러 가지 업무를 이유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접촉자가 많은 집단이다 보니 그만큼 감염에도 취약하다.
대구 신천지 발 확산이 한창이던 때 지역 일간지 취재기자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었지만,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도 스치듯 들었다. 울산에서도 언론 종사자 가운데 진단 검사를 받는 사례가 속속 나오면서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회사 차원에서 사내 확진자 발생을 대비한 원격 프로그램 매뉴얼도 공지됐다.
장기화 국면에 들어서자 경상일보도 초유의 지면 감면, 보직자를 제외한 직원 순환 휴직에 들어갔다. 편집부에선 내가 5월 첫 휴직자가 됐다. 유급휴직,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비공식적 일시 실직 신세가 되고 보니 이제야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평소 긴 휴가가 생긴다면 마음 편히 여행을 다녀오리라 꿈꿔왔지만, 감염병과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휴직으로 꿀같은 휴식에도 여행은 꿈도 못 꾸게 됐다.
‘거리두기’가 우리의 생활을 삼켜버린 지 수개월째, 우리는 ‘비대면 권장’ 시대에 살고 있다. 출고 부서, 데스크, 그래픽 기자 등 지면 편집을 위해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편집 기자에겐 비대면은 그야말로 먼 나라 얘기다. 가급적 접촉을 피하기 위해 메신저와 전화로 의견을 주고받지만, 답답할 때가 적지 않다.
바로 옆 초등학교 운동장엔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어차고, 많은 곳에서 빗장이 풀렸지만 겨울의 끝 무렵 시작된 감염병은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울산에선 석달째 지역 감염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폭풍 같은 마감을 하고 동기들과 함께 하는 맥주 한 잔, 커피 한 잔이 그립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내 주변까지 다가왔던 그 놈… 다행히 음성 판정

경인일보 장주석 기자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은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갑갑하던 마스크도 이젠 언제 적응했는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맥주 이름인줄만 알았던 그것을 빼고 이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것이 기사 제목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아도 누구나 그것인줄 아는 그것. 인상 깊게 본 영국드라마 ‘이어스 앤 이어스’의 장면과 겹쳐지며 마치 코로나가 인류의 멱살을 잡고 미래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닌가싶은 생각마저 든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일하는 곳의 풍경도 변했다. 마스크 쓴 회의가 당연해졌고 목소리는 낮아졌다. 식사 시간에는 띄워 앉아 밥을 먹는다. 취재기자들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낯선 사람과 승강기를 함께 타면 으레 더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이 재난이 일상을 가깝게 스쳐간 적이 있었다. 회사 동료 한분이 접촉자로 분류됐다. 귀국한 아들이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아침부터 문자를 받고 머릿속에 내가 그분과 언제 접촉했었나 상기해 보았다. 감염의 불안보다는 회사가 폐쇄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재택근무를 위한 원격업무 시스템은 테스트까지 마쳤지만 실제로 쓸 일이 생길 줄이야. 다음날 그분의 검사결과에 모든 것이 달린 상황이었다. 만약 양성이 나온다면 당분간은 집에서 원격으로 지면을 제작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일하는 것은 재미로 상상은 해봤지만 실제로 해 볼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어쩌면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그렇게 집에서 대기하던 중 마침내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음성’. 아마도 감염을 대비해 방역수칙을 잘 지킨 덕분이리라. 자제분도 빠르게 회복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코로나는 다시 나의 삶과 멀어졌고 ‘비일상의 일상화’ 같은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두어 달이면 끝나겠지하는 기대는 내년에는 나아질 것이란 희망사항으로 변했다. 인생은 한치 앞도 모른다더니 이런 일상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언론의 신조어 인줄만 알았던 ‘코로나블루’도 경험했다. 단절하는 것과 단절 당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의미였다.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다 보니 자연스레 약속이 줄고 사람도 덜 만나게 됐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고립감이 찾아온 것이다. ‘K방역’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내 이웃과 동료들의 삶의 만족감도 높아졌을까? 코로나는 사람의 온기가 소중하다는 걸 새삼 일깨워줬다. 무엇보다 내가 필요하니까, 주변을 더 돌아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난리에도 사람들은 서로 응원하며 살고 있구나

영남일보 나은정 기자

코로나, 코로나, 마스크, 확진자, 코로나, 마스크, 신천지, 코로나….
하루에도 수십 번을 마주하던 단어들인데 이젠 만나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길에는 지나는 사람도 차도 사라지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확진자가 수백 명씩 쏟아지던 때가 불과 석 달 전이라니.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여기가 그때 그 대구 맞나?
올해 초 중국 어느 도시에서 괴질이 돈다는 뉴스를 봤을 땐 사태의 진원으로 추정되는 야생동물 거래 시장의 야생적 영상에 압도돼 질병 자체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보도가 이어지면서 이전에 여행했던 도시 중 한 곳이 우한 바로 옆에 위치한 곳임을 알게 됐을 때도, 그 습하고 후텁지근했던 날씨가 떠올라 ‘으…’하고 몸을 약간 떨었을 뿐이다.
그러다 2월 18일 정말 일이 터졌다. 확진 0명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이곳에서 그 유명한 31번 확진자가 나온 것이다. 빅뱅으로 새 우주가 시작되듯 이날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코로나 관련 지역 기사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디 작은 그 미물은 사회면에선 이런 사연으로, 경제면에선 저런 모습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곳곳에 마수를 뻗쳐갔다. 인근 건물에서 확진자가 나오자 회사에선 만약을 대비해 편집기자들에게 원격근무를 준비시켰다. 친구가 일어나자마자 눈곱만 떼고 “나 출근 한다” 하고는 컴퓨터 있는 옆방으로 들어간다는 애길 들었을 때만 해도 웃고 말았던 일인데…. 미디어부에서 알려준 대로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회사 PC에 원격접속 후 지면제작기 오픈. 작아진 화면을 보자마자 번잡스러워질 작업과정 5조5억 개가 눈앞에 훤하게 펼쳐진다. 제발, 부디, 만약은 만약에 그쳐주기를.
그렇게 ‘코로나’라는 단어와 씨름하며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수없이 되뇌던 때쯤 맞은 어느 휴일. 일이 있어 이 지역 코로나 거점병원인 동산병원 앞을 지나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의료진 서너 명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내 앞을 지나간 것이다. 글자로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그저 제목을 뽑아내야 하는 기사의 대상이던 그들이, 말 그대로 생과 사가 오가는 현장의 전사로 내 앞을 뛰어 지나간 것이다. 그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선별진료소 속 봉사자, 현관 앞 수북이 쌓인 식료품 상자와 그 위에 붙은 손 편지, 병원 외부를 감싸듯 둘러싼 응원 현수막들. 그렇구나, 이 난리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살고 있구나.
초라한 기억력 탓에 그때의 감흥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전과 이후의 나는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곳에서 코로나를 겪어낸 사람들, 아니 세상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할 터. 코로나 종식을 선언하는 날, 졸업식 때 학사모 던지듯 마스크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는 친구의 바람이 하루 빨리 이뤄지길 바라본다.


워킹맘 삼총사, 상상 못한 재택 편집을 하다

중도일보 서혜영 기자

‘집에서 신문편집을 한다고?’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는 우리 생활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회사, 학교를 비롯한  일상이 마비됐으며 그리고 그 변화는 신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회사 역시 비상체제로 움직였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재택근무 시스템을 준비하며 부서 역시 분주해졌다. 10년이 넘는 신문사 생활동안 고유 프로그램이 필요한 편집은 늘 회사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영역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안되는 건 없었다. 원격 시스템을 통해 집에서도 편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학교 때문이었다. 우리 부서에는 나를 비롯해 3명의 ‘워킹맘’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교 2학년이다. 코로나19로 ‘온라인 개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워킹맘 3인’은 본격적으로 재택 근무에 들어가게 됐다. 쉽지않은 결정이었다. 편집업무 특성상 기사 프린트부터 전달, 교열업무, 기사밸류 측정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배들과 실시간으로 카톡과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편집을 해나갔다. 너무 고맙게도 부서원들은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주며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처음 해보는 자택근무도 손에 익지 않아 불편했다. 처음엔 오류도 잦아 로그인을 몇 번씩 해야 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편집이기에 자주 흐름이 깨져 힘들기도 했다. 일하는 틈틈이 아이들의 식사를 비롯해 집안일도 해야 했고, 때로는 놀아달라며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짜증도 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에게 신문 편집 작업을 보여주기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우리 세 사람 모두는 회사로 복귀한 상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로 인해 언제 또다시 재택근무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특히나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은 지금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며 두렵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며 마음 한편은 늘 긴장 상태이다.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재택근무 후 결혼 안한 후배들에게 “나중에 너희가 아기 낳고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농담을 하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었다. 하지만 어서 사태가 진정되고 이런 일이 앞으로는 다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배려해 준 부서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