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아시아경제 임훈구 부장의 편집 사부곡 


 #1970년대 신문사 공휴일은 설날과 추석 그리고 어린이날뿐이었다. 전국의 편집기자들에게 ‘한국신문협회장기쟁탈 배구대회’는 동병상련의 동지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잔칫날이었다. ‘쟁탈’이라는 과격한 단어의 배구대회는 2001년까지 계속 됐고 이듬해 전국 일간신문·통신 편집기자 배구대회로 이름을 바꿨다. 2015년이 돼서야 지금의 명칭인 ‘전국 편집기자 배구대회 및 가족운동회’가 되었다.

1975년 10월 12일 서울운동장 배구장에서 제9회 한국신문협회장기쟁탈 편집기자 배구대회가 열렸다. 결승에 오른 경향신문사의 장신 공격수가 펄펄 날았다. 전설의 184연승을 기록했던 실업여자배구 최강 대농(미도파의 전신)팀 체육관에서 특별 훈련까지 받은 경향신문은 두 번째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코트에서 장신의 공격수가 주인공이었다면 관중석은 꽹과리의 독무대였다. 시끄럽다는 다른 신문사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의 꽹과리 응원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대회는 경향의 준우승으로 끝났다. 14대 편집기자협회장은 손윗동서 중앙 공격수에게 미기(美技)상을, 조카에게 응원상을 수여했다. 경향신문 편집기자들은 경기 후 회식 자리에서 트로피 세개에 술을 가득 붓고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어린 아들까지 동원해 트로피 싹쓸이” “트로피 부자” “팔은 안으로 굽는 경향이 있다” “편집기자 잔치냐 경향 집안잔치냐” 사회면 제목 같은 농담이 쏟아졌다. 습관은 못 속인다.


 








 1975년 10월 12일 제9회 한국신문협회장기쟁탈 편집기자 배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경향신문사 편집부와 가족들.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모자를 쓰고 있는 임현태 17대 편집기자협회장. 오른쪽 사진은 1978년 5월 21일 경기도 마석에서 열린 편집기자협회 제15차 정기총회에서 제17대 임현태 회장이 취임사를 읽고 있는 모습.



부친의 편집기자협회장 역임은 사실 내겐 오랜 부담 

칭찬에 인색하시던 父 닮아가 '나도 꼰대인가' 생각도 

2대째 장사하는 동갑내기 단골집 사장님과 '동병상련'


# 아버지와 이모부가 편집부 데스크 출신이고 편집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같은 일을 하는 나에게 항상 부담이었다. 스포츠신문에서 꽤 오래 편집 일을 했지만 잘한다고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스포츠신문 편집을 마뜩잖게 생각하셨다. 과장된 제목, 주먹만 한 1면의 노란색 활자, 아슬아슬한 사진들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목과 레이아웃이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한 날, 신문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도 별 말씀이 없었다. 원래 칭찬에 박한 분이다. 한소리 듣지 않으면 그게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경제지로 신문사를 옮기고 사회면을 편집하면서 편집기자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칭찬은 포기한 상태였으므로 운 좋게 얻어걸린 상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제목 재밌더라”. 아버지는 은퇴한 편집기자들의 집으로 배달되는 협회보를 꼼꼼히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한 마디는 이 일을 하고 지금까지 들어 본 가장 큰 칭찬이다.

이제 나는 칭찬을 듣기보다는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칭찬에 인색해졌다. 시간에 쫓기며 제목을 달고 레이아웃을 하는 편집기자는 노동의 양보다 질이 중요한 직업이다. 다른 직업도 비슷하겠지만 이 일은 유난히 그렇다. 이제 기자도 주5일, 52시간 넘지 않게 일하고 있지만, 편집의 질은 얼마나 좋아졌는지 잘 모르겠다. ‘워라밸 기자’들 앞에선 이런 말하면 안 된다. ‘나도 꼰대구나’ 혼자 생각한다. 나이는 못 속인다.


# 관중석에서 꽹과리 치며 응원하던 나도 편집기자 체육대회에서 배구를 한다. 중앙공격수는 아니고 개인상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준우승은 두 번이나 경험했다. 아마 최고령 현역일 것이다. 배구대회에서 만나는 다른 신문사 선후배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놀리지만 편집부 후배들이 왕따만 시키지 않는다면 계속 뛰어볼 생각이다. 

아들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신 아버지 덕분에 내가 자주 가는 노포의 대부분은 대를 이어 단골인 곳이 많다. 장충동 평안도족발과 평양면옥, 을지로 안동장, 다동 부민옥, 양평동 대원집, 방화동 차돌집…. 지금은 SC제일은행 본점 뒤에 자리 잡은 ‘열차집’은 피맛골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부터 자주 찾던 곳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2대째 장사를 하는 동갑내기 사장은 몹시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나만 보면 빙글빙글 웃는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말에 꼼짝 못 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