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사실 우리끼리는 농담처럼 얘기해요. 우리가 더 많이 죽어야 한국 산악 수준이 더 높아진다고.”

섬뜩한 얘기를 하는 얼굴에 미소가 잔잔했다. 산에서 죽는 게 두렵지 않느냐는 직설적인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더 일직선이었다.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개(일명 14좌)를 ‘한국인 최초로 무산소로 오른’산악인 김창호를 2014년 3월 만난 자리에서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히말라야에서 죽었다. 구르자히말이라는 유명하진 않지만 악명은 높은 산에서였다. 험한 산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려다 눈사태에 휩쓸렸다.

나는 2019년까지 취재기자였다. 취재하면서 만난 이들의 근황을 종종 뉴스에서 알게 될 때가 있다. 가장 최근에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이다. 알려졌다시피 장애인 최초 14좌 완등을 이룬 후 돌아오지 못했다. 2009년부터 2년간 산악 담당이었는데, 김홍빈을 만난 건 2009년 가을 안나푸르나에서였다. 당시 난 한 산악인의 등정에 동행 취재를 갔다. 김홍빈도 비슷한 시기에 안나푸르나 등반에 나섰다. 김창호를 처음 만난 것도 그때다. 베이스캠프에 머물 때 식사도 함께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안타깝게도 내가 만난 산악인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히말라야에서 만났고 한국에서는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이들. 그중 여러 명이 다시 산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박영석, 박영석이 아꼈던 청년대원 둘, 김창호의 단짝 후배였던 서성호 그리고 김창호 김홍빈까지. 직업이 기자이니 아무래도 주목 받는 인물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그만큼 위험하고 모험적인 도전을 했을 거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잊을 만하면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설마 내 탓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산악인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 극단적인 반응도 나오곤 한다.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도전 자체를 조롱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두 시선 모두 조금 불편하다. 특히 비난의 시선이 그렇다. 꽤 많은 사람들이 산악인을 향해 왜 위험한 곳을 구태여 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세금 쓰게 하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냐고 공격한다. ‘왜 굳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활 잘 쏘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고 피아노 잘 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산악인의 도전을 조롱하는 시선은 과도한 영웅화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 직접 만나본 산악인들은 대부분 평범했다. 사람들은 큰 산을 오르니 마음도 넓을 것이라 지레 기대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자기이익에 민감하고 다른 산악인을 시기 질투하기도 한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게 있다면 정말 끌리는 일을 한다는 거다. 김창호는 “산에 오를 때마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 모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산에 있을 때 진정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동시에 죽음과도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의미다. 

스스로 정말 가슴 뛰는 일을 찾은 이들. 그리고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이들. 그 일을 하다 죽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할 만큼 ‘나’를 진정 사랑하는 이들. 높은 산에 올라서가 아니라 높은 산을 끊임없이 오르고 있기에 난 그들을 존경한다기보다는 부러워한다.

아무쪼록 내가 계속 부러워할 수 있도록 나와 인연이 있는 산악인들, 그러니까 남은 분들이라도 부디 무사하셨으면 좋겠다. 산이 좋아 산에서 잠들었다는 건 흩날리는 위로일 뿐 슬픈 건 슬픈 거다.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동아일보 한우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