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박민용 부국장이 지난 4월 세종문화회관 한국캘리그라피 회원전에서 ‘선거’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7년 전 우연히 캘리그라피 입문
한 작품 위해 열흘보름 계속 쓰기도
내년쯤 개인전 열어볼까 궁리 중
작년 신인문학상 받아 시인 입문


자기 삶에 제목레이아웃 해봤는지
편집 후배들, 인생편집도 해보길


‘100세 시대’. 이제 대한민국도 어엿한 고령화 사회다. 정년 후, 퇴사 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때로는 쳇바퀴 같은 일상의 탈출을 꿈꾸지만 그도 쉽지 않다. 그에 대한 해답을 좀 찾을 수 있을까….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부일보 박민용 편집부국장을 만나 그의 별난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14일 수원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박 부국장은 “현재 내가 헤엄치고 있는 우물 밖으로 한발만 내디뎌 보라. 죽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며 변화와 도전을 설파했다.


— 작년 12월 ‘수원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늦었지만 축하드린다. 어떻게 시인 등단한 건가.
“시를 좋아해 학창시절 문예반 활동을 했다. 수필가 겸 시인인 누나와 편지로 습작시를 보내고 지도를 받곤 했었다. 한때는 인사동 ‘시인학교’라는 시인들의 아지트 카페를 드나들며 순수 시동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문사 기자로 산다는 게 어디 녹록한가. 꿈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러던 중 작년에 신인상에 도전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천양희, 오세영, 정진규 시인과 박병두 소설가, 방민호 문학평론가의 심사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이었고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한 개를 이뤘다.”


— 최근 세종문화회관서 대통령 선거를 주제로 한국캘리그라피협회 전시에 참여했다. 그 이전에도 매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캘리그라피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지금껏 편집을 계속해 왔지만 스스로가 정체되는 느낌이 들면 메뚜기처럼 탈출을 감행하지 않았나 싶다. 7년 전쯤 사보 제작 광고회사에 다닐 때였다. 우연히 한국캘리그라피협회 간판을 보고 방문하게 됐다. 걸려있는 작품들을 보고 ‘이거다’라는 생각에 바로 등록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붓 들고 글씨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아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다. 글씨를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이 캘리그라피다. 내가 슬픈 감정을 가지고 글씨를 썼다면 사람들이 ‘슬프다’고 느껴야 한다. 그게 좋은 글씨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밤새서 쓰고는 다음날 다 찢어버리고, 또 밤새고 찢어버리고…. 붓과 내 감정이 ‘접신’이 돼야한다. 전시에 작품 하나 내놓기 위해서는 밤새 4~5시간씩을 꼬박 서서 글씨를 쓴다. 내가 원하는 느낌이 나올 때까지 열흘이고 보름이고 계속 쓸 수밖에 없다.”


— 예술작업이나 마찬가지네요. 화가가 그림 그리듯 열정을 다해.
“보기에는 단순하게 글씨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쓰는 게 아니다. 쉽게 “글씨 좀 하나 써달라”는 사람이 제일 싫다. 농부가 농사를 대충 짓지 않는 것처럼 캘리그라피도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작가정신이 녹아들지 않으면 사람들과 제대로 교감을 할 수 없다. 지난 4월 5일부터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캘리그라피협회전을 열었는데 그림이나 비주얼적인 것을 더하지않은 ‘날것의 글씨’로만 작품을 올렸다.  글씨 하나만 가지고 감성을 전달해야 한다. 작품에 레이아웃, 디자인 개념은 필수다. 이런 부분에서 편집경험은 상당한 도움이 된다.”


— 여백이나 글씨 크기 등등 이런 것들을 다 계산해서 하는 건가.
“캘리그라피는 가독성과 심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마음을 담는 것이다. 흔히 ‘아름다운 손글씨’라고 하는데 나는 ‘마음 글씨’라고 말한다. 아름답기만 해서는 감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글씨를 쓰다보면 기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는다. 기교를 벗겨내고 민낯의 나와 마주할 때 작품이 나온다. 사실 편집도 마찬가지다. 편집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노선이 있다. 편집이 화려하면 본질이 묻혀버린다. 편집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편집철학이다. 요즘은 가히 ‘비주얼의 홍수시대’다. 독자들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과도한 친절을 경계해야 한다. 뉴스를 현란하게 포장해 독자들을 유혹하는 게 아니다. 반찬수가 30여개 되는 밥상보다 3~4개뿐일지라도 정갈하고 맛있는 밥상 같은 그런 편집이 필요하다.”


 — 캘리그라피를 하면서 느끼는 게 있다면.
“사람들이 생각을 잘 안 하고 산다는 것이다. 한번은 일반인들이 글씨 쓰는 걸 도와주는 행사가 있었다. 40대 주부가 남편 생일에 ‘사랑해’라는 글씨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지나가면서 물어봤다. ‘어떤 사랑이세요, 남편하고요?’ 그랬더니 대답을 못하더라. 그래서 다시 물었다. ‘사랑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요. 불타는 사랑, 동짓달 화롯불처럼 은은한 사랑, 부부싸움 뒤의 밉상인 사랑…. 어떤 사랑인가요?’ 했더니 내 얼굴만 쳐다보더라. 그냥 쓰시라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40여분이 지나도 그대로 앉아 있기에 물었더니 어떤 사랑인지 모르겠다며 울더라. 캘리 강의를 다녀 봐도 마찬가지다. ‘꽃’ 한 글자를 쓰라하고 어떤 꽃이냐고 물으면 거의 ‘그냥 꽃’이라고들 대답한다. 세상에 그냥 꽃이 어디 있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로 받은 꽃인지, 부모님 무덤에 울면서 가져간 국화꽃인지, 끝내 전해주지 못해 시들어 버린 짝사랑의 장미꽃인지. 답답한 일이다. 그만큼 우리는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강의가 끝나면 수강생들이 연애편지 쓰던 때의 감성을 다시 찾게 해줘 고맙다고들 한다. 글씨를 통한 추억 속으로의 여행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을 잊고 산다는 방증이다.”


— 캘리그라피를 통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내 모토가 ‘배워서 남 주자’다. 집에만 둘 거라면 뭘 배우고 익히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월호 참사 때 TV를 보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겠더라. 다른 작가들과 화선지, 붓을 챙겨들고 무작정 안산 화랑유원지로 갔다.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살아 돌아오라, 보고 싶다’ 등 문구를 꼬박 2시간여 동안 먹먹하게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독도의 날 행사에서는 외국인들에게 이름과 ‘독도는 한국 땅’ 글씨를 써줬는데 엄청 좋아했다. 그들은 한글을 문자가 아니라 그림으로 인식한다. 글씨라고 말해주면 놀란다. 오히려 우리가 한글의 소중함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 보통의 편집기자들과는 좀 색다를 삶을 살고 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욕심껏 자신의 행복을 챙기기 바란다. 행복한 일을 찾고 투자하고 키워야 한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까지 꿈만 꿀 건가. 평생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동반의 무엇’을 찾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설계하고 준비하면 어느 순간 일과 꿈 두 가지가 같이 익어간다. 아마추어가 깊어지면 프로가 되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인생2막을 열 수 있는 나만의 기본기를 다져 나가기 바란다. 편집기자들은 매일 레이아웃을 하고 제목을 단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인생을 편집해봤는지 묻고 싶다. 내 삶에 제목을 달아본 적 있는지, 내 미래의 레이아웃을 그려봤는지. 그 좋은 머리와 실력으로 원하는 인생편집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이제 싫어하더라.(웃음)”


— 변화라는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한발만 나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제발 한발 짝만이라도 우물 밖으로 내딛기 바란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았다면 아마도 오늘 같은 내일이 되기 십상이다. 귀중한 하루를 왜 어제같이 보내려는가. 편집기자가 제일 안타까운 건 현장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대통령 서거 때, 한미FTA 반대집회 때 강판하고 후배들을 데리고 서울광장으로 가서 현장을 보게 했 다.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도 보게 해주고 싶었다. 2002년 광화문에서 월드컵을 응원하기 위해 신문사를 그만둔 적이 있다. 이때가 아니면 내 인생 언제 한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을 응원하는 날이 오겠나 싶었다. 광화문 근처 회사로 옮겼다.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붉은악마 셔츠를 입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어깨동무하며 응원했다. 그 축제의 한 달은 너무나 달콤한 경험이었다. 편집기자로 일해 오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참 오랜만에 받았다.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들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를 중심으로 신문편집이 있고 시가 있고 캘리그라피가 있다. 나를 빼고는 연결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여러가지 모습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시키는 거다.”


— 편집기자, 시인, 캘리그라피 작가 명함이 여러개다. 향후 바람은.
“내년쯤 캘리 개인전을 열어볼까 궁리하고 있다. 시인으로서는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 캘리그라피 시집을 내는 게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됐다. 내 인생은 계절로 치면 여름과 가을의 중간쯤이지 싶다. 곱게 물들어 가고 싶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무엇하나 대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더 노력할수밖에. 인생은 소풍길이라는데 재미있게 놀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뒷모습에서 사람냄새 나는 그런 삶이었으면 참 좋겠다.”


인터뷰·정리=경인일보 이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