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어? 우리 어디서 뵌 적 있지 않나요?”
누드 모델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정권 선배랑 눈이 마주쳤다.
“아. 오래전에 명동에서요” 이정권 선배(이하 이선배)가 답했다. ‘가가의 누드 크로키 교실’을 연 이 선배(중앙일보 그래픽데스크 차장)를 만나기 위해 부천으로 갔다. 어떻게 수업을 하나 궁금하기도 했다. 누드 크로키를 하는 작업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호기심도 발동했고. 수업 전에 인터뷰만 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수강생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한번 그리고 가지 그래”하고 이 선배의 제안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어 “어어어…네”하고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한쪽 탈의실에선 누드모델이 옷을 갈아입고 있고 나는 주섬주섬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크로키가 끝나고 땀이 주룩주룩 났다. 누드모델 탓은 아니다. 처음엔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식은땀도 조금 흘렸지만. 수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쩔쩔 맨 탓이다. 크로키는 제한된 시간 안에 재빨리 특징을 포착해 종이위에 그려 넣는 예술이다. 5분, 3분, 1분 등 시간단위로 모델이[의] 포즈가 바뀐다. 얼굴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번엔 1분입니다”하고 모델이 포즈를 바꿔버렸다. ‘헉. 난 아직 팔다리는 그리지도 못했는데’. 뭐 좀 그리려면 포즈가 확확 바뀌었다. 그 속도에 허겁지겁 따라가다 보니 운동을 심하게 한 것처럼 몸이 지쳤다. 30분정도 지난 것 같은데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땀이 많이 난 건 그 속도에 몰입을 경험한 탓이다. 이 선배에게 크로키와의 인연을 물어봤다.
−크로키는 언제부터 했나
7년 전쯤 취미로 명동에 크로키교실을 다녔다. 그때 크로키 매력에 빠져들어 지금까지 하다 보니 크로키교실까지 열게 됐다.
−누드라 흑심을 가진 수강생도 있을 듯한데
처음엔 엉큼한 목적으로 시작하지만 진지한 모습에 눌려ᅠ발길을 돌리는 수강생도 있다. 누드크로키는 취미미술 중에서도 비대중적인 장르다. ‘누드’라는 단어부터 색안경이 씌워진다. 하지만 막상 수업에 참여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본업이 있기에 시간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쉬는 토요일을 활용했다. 하루 종일 크로키만 하다왔다. 빠져들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돈을 받고 운영하는 크로키 교실이면 일종의 영리학원으로 볼 수 있을 텐데. 회사에서는 괜찮나?
하하. 영리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괜찮아. 간판은 가가의 누드크로키교실이지만 동호회 개념이다. 모델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전혀 없다. 공간도 작아서 회원들을 많이 받지도 못하고. 그냥 좋아서 시작했다. 크로키 교실로 돈 벌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딱히 말하자면 주변과 ‘미술나눔’ 차원? 이웃들과 크로키 하는 시간을 함께하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나눠주는 게 좋을 뿐이다.
−중앙일보 입사는 언제
92년도에 입사했다. 전에 동아출판사를 4년 다녔다. 88년도 동아출판사에서 처음으로 매킨토시를 접했다. 포토샵도 일러스트레이터도 버전 1.0이었던 시대. 그때 매킨토시의 매력을 느껴 밤새워서 팠다. 교재도 없었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서 독학으로 기능해부에 덤벼  들었다. 기능 하나하나의 새로움에 매일 밤새우다시피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매킨토시를 빠삭하게 때운 덕분에 중앙일보 입사했다. 92년 이후 대부분 신문사가 CTS시스템을 도입하며 ‘종합일간지의 컴퓨터 그래픽’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하고 많은 그림들 중에 왜 크로키에 빠졌나.
중앙일보에서 마우스와 디지털 펜으로 15년 넘게 작업하다가 우연히 빈 종이에 연필로 선을 긋는 순간 어떤 느낌이 왔다. 그 긁혀짐의 촉각이 손끝에 전달되는 순간 아날로그 감성이 되살아났다고 해야 하나. 연필과 종이로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누드 크로키다. 누드크로키는 짧은 시간에 결과물을 확인하기에 즉석에서 얻는 성취감이 높다. 누드크로키는 완성이 아니라 끝없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게 매력이다. 도구도 복잡하게 준비 안 해도 된다. 연필하고 종이만 있으면 된다. 그 간편성. 그 심플함의 강렬함에 이끌려 택한 것 같다. 그리고 연필로 종이 위를 빠르게 그려 나갈 때 크로키만의 쾌감이 있다. 그 스피디한 쾌감에 빠져들다 보면 몰입되고 다 잊게 된다. 붓글씨를 할 때처럼 집중되는 느낌.
−붓글씨? 붓글씨도 하나
아. 토요일 오전에는 서예학원을 다니고 있다. 크로키 교실이 오후 3시부터라 오전 시간을 이용 서예를 배우고 있다. 오후에는 크로키를 가르치고 있고. 크로키도 붓글씨처럼 집중되는 힘이 있다. 단색이라는 접점이 있고 크로키 중에 먹으로 하는 크로키도 있다.
−크로키 작품이 펜화 느낌도 나는데
그건 스케치들이다. 펜화랑 크로키도 흑백 위주로 몰입하는 작업이라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심플한 것을 좋아하다보니 신문 그래픽 작업도 가급적 컬러링 작업을 피한다. 번잡함을 싫어해 단색계열로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다. 모든 그래픽은 심플할수록 강렬하다. 제목도 심플하게 뽑는 것처럼.
−수강생은 몇 명?
크로키 교실을 열고 첫날 13명이 왔다. 정회원과 일일회원으로 구분한다. 정회원은 한 달에 4회 4만원, 일일회원은 1회 1만5천원을 받고 있다. 대학생들도 있고 동네 아줌마들도 많다. 철민씨도 이왕 온 김에 회원가입하지 그래?
-홍보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둘째딸이 홍보에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내 나이에 대부분 인생 이모작이다. 사업 초창기에 어려움이 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수강생들 중에는 부모의 반대, 가정형편 등 자라온 환경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어야했던 분들이 오는 경우도 제법 있다. 그분들이 화가의 꿈을 다시 이뤘으면 좋겠다.
−가가의 누드크로키 교실에서 가가의 뜻은
노망이 난, 좋아서 미친, 열정 등등의 의미다. 팝가수 레이디가가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림에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고 싶다.  
−편집기자들에게 누드 크로키를 추천하고 싶은가
물론이다. 편집도 촉이 있어야 좋은 제목, 레이아웃이 나온다. 그 촉을 기르는 힘이 크로키에 있다. 1분 포즈의 크로키를 할 때 1초 이내에 모델이 보여주는 ‘야마’를 재빨리 잡아내야 멋진 크로키 작품이 나온다.
−퇴임 후에도 계속할 생각인가.
그림을 그린 종이가 자신의 키만큼 쌓여야 겨우 크로키가 뭔지 이해한다는데 이제 겨우 배꼽정도 올라온 것 같다. 아직도 멀었다. 누드 크로키의 곡선을 보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 일주일에 한번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 일하며 날카로워진 나의 마음도 어느새 다듬어지곤 한다. 크로키 교실이 오래가길 바란다. 태어날 때는 빈손이었지만 죽을 때는 붓을 들고 죽는 게 소원이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그림으로 만나고 싶다.